우리 엄마를 소개합니다.
이 카테고리는 뇌출혈로 왼쪽 편마비가 온
엄마와 함께 하는 이야기를 쓸 예정입니다.
일단, 이번 페이지에는 저희 엄마를 소개하겠습니다.
저희 엄마는 어여쁜 70대 할머니이십니다.
엄마를 수식하는 말로 어떤 것이 어울릴까 생각하다가 '어여쁜'이라는 말을 넣게 된 이유는
저희 엄마는 스스로를 예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물론 외모꾸미기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주변으로부터 안타까운 시선을 받을 정도인 저의 관점이라 더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거울확인 안하고 외출하기/일년에 몇벌(아직 갯수를 못 정하고 있어요)의 옷들로만 생활하자가 목표인게 저입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아무렇게 입고 나가려는 저와 시간,장소, 여러등등에 어울리는 옷차림과 매무새를 하길 바라는 엄마와의 불꽃 튀는 전쟁이 늘상 있었습니다.
20대에는 엄마께서는 자꾸 옷을 사러 가자하시고, 저는 쇼핑을 15분 이상하면 두통이 와서 쇼핑가기 싫다고 버티며 주말마다 실랑이를 하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엄마께서 그때 끌고 가서 사주신 옷들을 중요한 날에는 꺼내입게 되니 엄마 덕분에 사람구실 할 형태를 하고 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어릴 때는 외모 가꾸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마가 겉모습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 마음 속에 있는 결핍으로 엄마는 외모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게 되신 것 같습니다.
엄마는 경주이씨 양반집의 셋째딸입니다, 엄마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저의 외증조부께서 살아계실 적만 해도 엄마 집안은 엄마말씀으로는 글을 꽤나하고, 동네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으러 오는 집안이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외증조부께서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께서도 일찍 돌아가시면서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다고합니다.
중간중간 살면서 들은 이야기를 합해보면, 엄마께서 10살쯤 되셨을 때,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고 그때부터 큰이모와 엄마까지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차츰 생업전선으로 투입되셨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이쁜 아이로 동네어르신들의 사랑을 받았다하십니다. 외모도 어여뻤지만, 예의바르고 등등.
엄마가 유년시절을 회상하실 때에는 늘 기쁨과 자랑스러움이 가득차서 수식어가 가득하기 때문에 그 수식어들이 모두 기억나진 않지만(수식어를 자꾸 흘려듣게 됩니다.) 뭔가 화창한 햇살이 가득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반면 10대부터 시작된 고생길은 엄마의 화창한 유년시절과 정반대로 비바람과 회오리바람이 가득했던 것 같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도 너무 힘들었다고 얼버무리며 끝이 납니다.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엄마의 자존심을 지켜주던 유일한 것은 엄마의 훌륭한 외모와 옷차림이었던 것입니다.
외모를 꾸미는 것을 엄마는 엄마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로 여기며 알게모르게 저의 외모도 저의 자존심으로 생각하시게 된 것 같습니다.
저희 엄마는 사회활동에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십니다.
엄마는 저희 집에서 가장 바쁜 사람입니다.
직장을 다니고 학교를 다니는 저희보다 더 바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께 불만이 있기도 했지만, 저는 끊임없이 배우고, 나누는 활동을 하는 엄마를 보고는 특별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활동을 하신다고 밥을 굶기지도 않으셨고 어떤 일에서든 저희 남매를 최우선으로 하셨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 모임사람들과 전쟁을 치르기도 하셨죠.)
엄마는 최근까지도 천아트를 배우시고, 어린이들에게 다도를 가르치시고, 여러 봉사활동을 하셨습니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주는 헌신적인 사람
저에게 엄마란 추호의 의심없이 불이나도 나를 구하기 위해 한치의 망설임없이 불 속에 뛰어들어올 사람, 천길 낭떠리지, 지옥 끝이라도 자식을 구하고 자식을 위하는 일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저도 자식을 키우고 있는 사람이지만, 저는 저희엄마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할 것같고, 이미 저희엄마같은 엄마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자식일 앞에서는 용감할까요? 어찌 그리 한치 망설임이 없을까요?
(저는 오늘도 딸의 가방에서 찾아낸 초코칩을 재빨리 저의 입에 넣었습니다. 딸이 가방에서 그 초코칩을 발견했다면 기뻐했을텐데, 식탐을 이기지못하고 제가 먹어버렸습니다.)
엄마가 주신 사랑을 떠올리면 눈물이 먼저 나버립니다.
어떨 때는 엄마의 사랑이 족쇄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험난한 길을 가고 싶은데, 내가 다치거나 실패하면 엄마가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 가던 길을 포기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아마 그건 제가 스스로 확신할 수 없어 엄마 핑계를 댄거겠지요)
엄마는 20년전 제가 중국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새벽마다 일어나 기도를 가시고 기도를 가는 그 길에 지렁이 , 달팽이, 태풍에 떠밀려 온 물고기, 덩쿨에 괴롭힘 당하고 있는 풀들을 다 구해주셨다합니다. 엄마가 그렇게하시면 우리딸이 위험에 처하면 누군가라도 이렇게 도움을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셨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우산을 가지고 다닌 적이 없습니다. 엄마가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달려오셨거든요.
처음 대학생이 되어 타지생활을 할때, 수업이 마쳤는데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근데 우산이 없었습니다.
그 전까지 우산을 들고 뛰어오는 엄마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다, 20살이 넘어 처음으로 비가 오면 언제든 우산을 들고 저를 기다리시던 엄마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식은 원래 부모의 공을 알 수 없다며 합리화하려해도 정말 제가 받은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은 그 깊이를 알 수도 그 은혜를 갚을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